난 교복을 입어서 그랬는지, 고등학교 때는 옷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는 정말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교 때는 남녀공학이었으니까 옷에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고, 중학교때는 여중이었지만 한창 사춘기가 시작되느라 옷에 온 신경이 쏠렸던 것 같다. 반면에 고교 때는 여고였지, 교복 입었지, 공부 압박도 심했지, 옷에 신경 쓸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거기다 한 가지 더, 계급 확인과 위신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옷만큼 이 문제와 관련이 깊은 삶의 필수품도 없을 테니까. 내가 고등학교 때, 우리 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같은 대단지 아파트에서 살았다. 거의 같은 계급으로’만’ 이루어진 집단 내에서’만’ 생활하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은 확실히 불안과 다툼의 여지를 줄인다.
청소년의 옷이 신분 경쟁과 차별의 수단이 된 거야 꽤 오래 되었지만, 아니, 인류의 유사 이래로 계속 그렇지 않았을까 싶지만, 우리나라에선 유달리 ‘스포츠웨어’로 척도가 나뉘게 된 건 좀 의아하다. 내가 청소년이던 80년대 때도 남자 아이들은 ‘나이키’로 대표되는 스포츠 의류 브랜드에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나이 또래 아저씨들 중에서는 나이키라는 브랜드에 동경 비슷한 걸 아직도 품고 있는 경우가 꽤 있다. 막상 사러 가서 꼼꼼히 살펴보면, 너무 후져서, 돈 좀 버는 어른이라면 도저히 입을 수가 없을 것 같은 품질인데, 브랜드의 명성만은 여전한지, 어느 쇼핑몰엘 가도 가장 큰 매장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로 스포츠 브랜드 붐이 불었고 나이스 프로스포츠 등 유사 브랜드까지 등장해 요즘도 추억의 코미디 소재가 되고 있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노스페이스, 클레어뭐시기 등 스포츠 브랜드들이 부모등골브레이커라 불리며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의 흥망성쇠를 이어가고 있다. 인터넷에는 스포츠 브랜드 ‘계급도’가 떠돌고 말이다.
그러나 여자인 나에게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브랜드는 ‘이랜드’로 대표되는 중저가 패션 브랜드다. 원래 저가 옷에는 브랜드가 없는 법이다. 예전엔 그런 걸 ‘시장에서 산 옷’이라고 불렀고, 지금도 남대문 시장에 가면, 뭔가 상표가 달려 있기는 달려 있되, 다른 어떤 상표와 닮으려 애를 쓰거나, 혹은 상표가 눈에 안 띄려 애쓰는 옷들이 휘날리고 있다. 브랜드가 없을 수는 없되, 브랜드 인지도는 없는 옷이라고나 할까.
세간의 분석에 따르면 80년대 교복 자율화 이후 청소년을 위한 의류 시장의 질적 양적 성장과 팽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들이 원조 패스트 패션, 원조 중저가 브랜드가 아닐까. 사실 이 시대의 실질적 주인공이었던 이랜드 제국의 팽창은 내가 고등학교 때를 넘어 대학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90년대 ‘닉스’로 대표되는 고가 수입 청바지가 인기를 끌면서 고급 브랜드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요즘도 서울이 아닌 지방 도시의 번화가에 가면 아직도, 헌트 브렌타노 제이빔 등, 추억의 의류 브랜드 판매점을 볼 수 있어서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방에 전학 갔을 때 비로소 사춘기 아이들의 브랜드 집착을 처음 느껴보았던 것 같다. 비록 중저가 브랜드였지만, 금방 입고 버릴 사춘기 아이들이 툭하면 새옷을 사입고 나타나는 풍경이 무척 낯설었다. 누군가는 '가난한 사람이 옷을 더 신경써서 입는다'는 논리를 대기도 하던데,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옷에 대한 회고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대앞 히피풍 옷가게와 예술가 학우 (0) | 2019.03.18 |
---|---|
대학생의 단체 티, 행사 물품의 전락 (0) | 2019.03.14 |
중학생의 구루프와 교정기 (0) | 2019.02.27 |
초등생의 노란 바지 (0) | 2019.02.27 |
토끼 털 코트 (0) | 2019.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