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여름방학에 두 달 간 유럽에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특히 이탈리아를 일주일 가량 돌아다니며 미의식이 개안되는 경험을 했다. 인류 문명의 정점에 해당했던 고전 시대 유적들이 잘 보존된 시내의 분위기도 숭고한 기운마저 감돌았지만 거리의 가게마다 보이는 현대 공산품들의 내공도 심상치 않았다.
이탈리아 직전에 일주일가량 머문 프랑스에서도 인상파 미술관과 케이크 가게 등을 주로 구경하며 역시 소문대로 멋진 나라라서 너무 신난다 하며 돌아다녔지만 '신성한' 정도의 느낌까지는 안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숭고미를 찾아다니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정신과 실용적인 미감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그런 면에서는 프랑스가 더 맞을 것이지만, 이탈리아에는 그런 나의 취향과 가치관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탈리아 여정을 고대 유적과 성당을 중심으로 채웠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들르는 도시마다 한두 군데의 필수 관광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상점가를 배회하며 예술적으로 맛있는 샌드위치를 사먹고 상품들을 구경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이전, 우리나라의 문물이 많이 부족했던 때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반나절만 잠깐 들른 피렌체에서는 아예 그 유명한 두오모에조차 올라가지 않았다. 입장료도 비쌌고 무더위에 수많은 관광객들 틈바구니에 끼이기에는 진저리가 났다. 대신 반나절 동안 젤라또를 두세 개나 사먹으며 상점가를 배회했다.
피렌체는 가죽 제품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물론 고가의 명품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 높이 솟은 하이엔드 제품들 아래쪽에는 거리의 노점상들에마저 대충 겹겹이 걸어놓고 파는 신박한 가죽 제품들이 있었다. 제일 싼 물건들조차 제각각 어쩜~ 싶게 감탄스런 스타일들에 눈이 돌아가다가, 나는 20대 초반 배낭여행자의 지갑 사정에도 불구하고 가죽 가방을 두 개나 충동구매했다.
하나는 약간 평범한 핸드백이었지만 자연스럽고 귀여운 스타일과 아르테코풍 윤곽에 마음을 빼앗겼다.
또다른 하나는 아무리 보아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디자인의,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만든 가방 같았다. 대형 여성 가방이었는데, 숄더백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끈을 희한하게 엮어서 백팩으로도 쓸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어찌 보면 아이디어만 넘쳤지, 막상 사용하게 되면 영 불편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것 같은, 그야말로 유래를 찾기 힘든 디자인이었고 황금색이 도는 가죽은 아주 부드럽고 튼튼했다. 내부는 천을 덧댔는데, 그 역시 질기고 감촉 좋은 두꺼운 면 섬유인 듯 품질이 좋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늘 그 두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비싸 보이지 않으면서도 멋스럽고 특이해서 칭찬을 종종 들었고 한 멋쟁이 언니도 보고는, 나중에 낡아서 버리게 되면 자기를 꼭 달라고 했을 정도다.
정말 오랜 세월을 들고 다녔던 그 가방들 중 큰놈은 언젠가 찢어져서 이대앞 수선집까지 들고가 새 천과 가죽을 덧대며 쓰기도 했지만 결국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버린 지 꽤 되었다. 작은 가방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 이후로 나는 가죽 제품을 안 사게 되었다. 동물 권익과 친환경 사상 등의 유행에 물들어서인데, 그러면서도 고기는 계속 먹는 건 모순이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이젠 가죽 제품이 꺼림직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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